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로스 3세 (문단 편집) === 인품 ===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이며[* 고대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 1세]]와는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왕자]] [[알렉산더]]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웅]]들을 생생하게 '내면화'했었으므로, 넓은 의미에선 [[레오니다스 1세]] 역시 스승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는 [[교육학]]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는 내용.]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서구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더불어 쌍벽으로 예우받는 위대한 [[철학자]]이다. 단, [[왕자]] 신분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학자로 활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굉장히 깊은 단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습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버트런드 러셀]]은 플루타르코스가 과장했다고 여겼는데, 실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알렉산드로스의 행보 사이에 별 관련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계획도시]]들을 줄줄이 세우고, 책의 중요성을 강조해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세울 목적으로 20만여 권에 달하는 책을 모으고, 또 자신의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동행시켜 가는 곳곳마다 학문의 융성을 이뤄내는 등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적다고 할 수 없는 학문 친화적인 행보들을 보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훗날 뛰어난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줄줄이 쏟아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수학]], [[과학]], [[논리학]]을 포함해 현대 문명의 핵심 근간이 된 서양 문명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상당 부분이 기원했는데, 학문을 사랑했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성향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환경에서 배출된 [[아르키메데스]]가 후대의 기라성같은 [[과학자]]들에게 준 영향력들과 [[유클리드]]의 [[원론]]이 현재 문명에까지 주고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학문적인 환경을 당시 세계 곳곳에 조성하거나 전파한 점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반적인 정복 군주들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철학]], [[과학]], [[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책을 사랑하고 연구를 장려하는 정책들을 항상 견지했으며 또한 현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권개념이 부족했던 고대 시대의 인물이었음에도 포로로 잡은 적국 사람들 중 학자, 시인과 같은 예술적인 인간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죽이지 않는 등 아량을 보였다.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완전히 빠져 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야망이 매우 커서, 부왕인 필리포스의 승전 소식을 들을 때면 매우 울적해하며 친구들에게 >'''"부친께서 이렇게 나라들을 계속 정복하신다면 나와 너희가 자라서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탐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평생을 가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이라고 말했다. [[부케팔로스]]의 일화에서 보이듯, 배짱이 매우 강했다.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였다.[* 하지만 인도 정벌시 [[포루스]] 왕과의 전투에서는 그의 코끼리 부대와 포루스군의 군세의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보이고, 또 말년에는 자신에 관한 불길한 징조들과 점쟁이들의 불길한 예언들을 듣고 이로 인해 사기가 꺾이고, 공포를 느꼈다는 이야기들도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보인다. 또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의심했는데 특히 [[안티파트로스(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와 [[카산드로스|그의 아들]]들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역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보인다. '''[[헬레니즘 제국|대제국]]의 최고 수장으로서 그런 모든 공포 상황들마저 극복하고 언제나 전장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며 불패의 신화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포인트.'''] 모든 전투에서 황금 빛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11차례의 크고 작은 부상들을 입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때에는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기가 찬 [[파르메니온]]이 가서 직접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우리가 이미 이기지 않았소? 도망다니던 [[다리우스 3세|다리우스]]를 쫓아다니느라 우리가 기진맥진하였을 정도니 말이오." 라고 했다. 카파도키아 반도를 넘어가던 중,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폐렴이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는데, 어의들은 혹 자기에게 책임이 물어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필리포스라는 한 의사만이 대왕에 대한 애정으로 나서서 그를 간호하고 약을 지어줬는데, 며칠 후 정신이 좀 든 알렉산드로스에게 파르메니온이 쓴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즉 >"그 의사는 사실 다리우스의 사위가 될 욕심으로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전하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약을 통해 독살을 하려 한다." 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가 약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사발을 받고 쭈욱 들이키며 의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편지를 읽은 의사는 바로 사색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의사는 자신은 절대 이러한 의도가 없다며 살려달라 외쳤고[* 다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좀 다르게 전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시종일관 의사에 대한 신뢰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편지를 본 의사 역시 자신에 대한 모함에 분노하며 신들의 이름에 맹세코, 자신은 결백하다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왕에게 호소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약을 들이킨 뒤,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일으켜 세웠다. 군의 2인자인 파르메니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고 이는 들어맞았다. 하지만 부하들의 불평을 흘려듣지 않고 간언을 듣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하나, 이건 인도 원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회군한 것처럼 예외의 경우들이다. 파르메니온과 클레이투스와 칼리스테네스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신이라 믿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회군하던 때, 화살을 맞은 그가 피를 흘리며 >"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 라고 슬프게 말하기도 했다. 물욕, 육욕에 대하여 자제를 하려는 모습은 보였다. 이소스 전투 이후,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리우스의 아내 스타테이라 1세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그녀의 미모를 나에게 말하지도, 상기시키지도 말 것이다." 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했으며,[* 그런데 다리우스의 왕비는 1년 후에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와 동침해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사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페르시아의 여자들은 눈이 아플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라면서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그 이상 낭비는 하지 않았는데, >"저는 레오니다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식사법을 배웠으니 훌륭한 요리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면 야간 행군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적게 먹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원정 중반을 넘어가며, 재화가 숙영지에 넘쳐흐르던 때부터는 식사가 사치스러워졌으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원정 후반기부터 심신이 피폐해지며 폭음하는 일이 잦아지기는 하였다. 그리고 인도 원정에서 귀환 후, 기분 전환으로 술 마시기 대회를 열어 그의 부하들 중 대회 우승자를 포함해 42명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물욕이 없는 만큼, 베푸는 것의 기쁨을 잘 아는 이가 알렉산드로스였는데, 그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지나치리만큼 후한 대접을 하여, 친구들이나 동료 장군들의 부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페르시아의 한 고관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왕께서 오시기 전에 페르시아에는 다리우스 왕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여럿입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게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장군도 아닌 서기관 [[에우메네스]]가 자기 막사에 숨겨놓은 돈이 금과 은을 합쳐 1,000탈렌트 이상이었을 정도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부유했던 아테네의 1년 예산이 400탈렌트 정도였으니 그의 제장들은 모두 재벌급의 부호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에우메네스는 동방 원정의 행정과 보급을 일임받았으므로 군비를 횡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인 수사에 있었던 국고에서 50,000탈렌트를, 종교적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국고에서 120,000탈렌트를 전리품으로 얻는 데 성공했는데 이 중 군비를 제외한 상당한 액수를 제장들에게 나눠 주었을 것이다. 일개 병사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어느날 나귀가 지나치게 무거운 보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병사가 보물을 나눠 짊어지자, 대왕이 몸소 그 옆으로 다가가 >"힘을 내거라. 캠프까지 네가 그 보물을 들고 간다면 그것은 모두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인정도 깊어, 한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거짓되게 진술하고 전역하려 한 것이 걸렸는데, 그 사유가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자, 대왕이 이를 용서하며 그를 전역시켜 준 적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 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이집트인]]을 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마케도니아 왕국|야만인]]'''[*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s-2]])들은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국]]도 [[바르바로이]](=야만인)라고 여겼다.]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하자 시선을 [[아케메네스 왕조|밖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 이후에도 그 [[페르시아|야만인]]들을 잘 구슬려서 충성을 받은 걸 보면 정치적인 융화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제력이 매우 강한 편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충동적 행동을 할 때도 있긴 했다. 자제력이 강한 모습들도 이러한 충동적 성격 때문에 생겨난 태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회한 것, 술에 취해 자신의 은인이자 신뢰받던 장군이던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 등이 그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